대한제국 당시 서울은 어떤 업무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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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당시 서울은 어떤 업무를 했을까?
  • 김준기 정치·사회부 기자
  • 승인 2022.11.04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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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한성부 업무일지 한글로 풀이한 ‘국역 한직일기’ 발간
외국 공관 및 국내 관청들과 주고받은 공문서 핵심 내용 요약정리

 

자료=서울역사편찬원
자료=서울역사편찬원

대한제국 시기에 서울(한성)의 행정을 담당했던 한성부(漢城府)의 업무일지를 한글로 풀이한 번역서가 발간됐다.

서울역사편찬원은 조선시대의 한양이자 지금의 서울인 대한제국 시기 한성부의 업무 내역을 담고있는 서울사료총서 제19권 ‘국역 한직일기’를 발간했다고 4일 밝혔다.

국역 한직일기는 1903년 5월26일부터 1906년 1월2일까지의 기록으로 한성부 관원들이 날마다 작성했던 업무일지다.

기록의 제일 앞에 해당 날짜와 요일, 날씨, 출근한 관원의 명단, 숙직을 선 관원의 이름을 먼저 적고, 이어 외국 공관 및 국내 주요 관서들과 주고받은 공문서의 핵심 내용을 요령 있게 정리했다.

오늘날 요일표기법은 ‘수요일(水曜日)(수+요일)’의 형태를 따르는데 한직일기에서는 ‘일(日)’을 생략한 ‘수요(水曜)(수+요)’라는 형식으로 표기한 점이 독특하다.

한직일기 기록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각각 소장돼 있다.

‘국역 한직일기’의 특징적인 부분은 외국공관과 주고받은 공문 중,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공문들은 서울에 거주하는 자국민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것이 대부분인 반면, 일본의 경우 자국민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공문이 많다는 점이다.

‘국역 한직일기’에 나오는 외국 공관은 일본을 비롯한 청나라(중국),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공관 등이다. 많은 공관들 중, 당시 조선의 사활이 걸린 지역으로 판단했던 일본 공관이 제일 많은 공문을 주고 받았다. 그 다음으로는 청일전쟁(1894~1895) 패배 후 1899년 조선과 대등한 국가간의 조약인 ‘한청조약’을 체결했던 청국이 가장 많은 공문을 주고받았다.

외국 공관에서 보내온 공문서는 대부분 자국민이 매입한 주택에 대한 가계(家契: 주택 소유 증명서)의 발급 요청 등 서울에 거주한 자국민의 이권 또는 이해관계를 대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반면, 일본의 경우 경부철도 부설, 용산 일본군 기지 건설 등 국가 이해관계를 대변한 공문들이 다수 기록되었다.

경부철도 부설과 관련 일꾼과 자재 조달, 품삯 미지급 해결 촉구, 피해 입은 토지에 대한 보상과 세금 감면 등이 주된 내용이다. 용산 일본군 기지는 1906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지만, 이미 1905년 7월부터 토지수용을 시작했다.

한직일기에는 1905년 7월부터 그해 말까지 일본군 기지 및 군용철도 관련 40여 건의 공문 요약본이 실려 있다. 7월 말 일본군사령부가 기지 영역을 정하자, 한성부는 내부(內部)의 지시에 따라 영역 내에 있는 가옥․전답․관유지․민유지․분묘 상황을 조사해 보고했다. 또한 해당 지역 백성들이 토지의 강제수용에 항의하며 한성부와 내부로 몰려들자 이들을 무마시키기도 하고, 백성들을 한성부로 오게 해서 수용된 가옥, 분묘 등의 보상비를 지급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한성부와 국내 관청이 주고받은 공문서도 기록되어 있다. 특히 갑오개혁으로 한성부의 업무 일부를 인계받은 한성재판소 및 경무청과 주고받은 공문서가 많이 실려 있다.

이상배 서울역사편찬원장은 “국역 한직일기는 대한제국 시기 서울에서 어떤 사건들이 발생했는지와 함께 외국 공관과의 관계 등 한성부가 처리했던 구체적인 업무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번역 작업”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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